강남의 탄생 읽다

내가 그때 현대아파트를 샀어야 했는데…”

2010년 즈음 몸 담았던 회사 대표님이 자주 하던 넋두리다. 그분 댁은 논현동 동현아파트.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했지 그 뒤에 숨겨진 컨텍스트까지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최근에 강남의 탄생을 읽고 나서야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그분 얘기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한종수, 강희용 씨가 엮은 강남의 탄생은 오롯이 강남의 역사만을 주제로 다룬 책이다. 저자는 발문에서 강남 개발 초창기부터 강남의 역사만을 다룬 책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자부한다고 밝힌다.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이른바 강남 3구를 강남의 기본으로 두고 때에 따라 여의도, 목동, 과천, 분당, 판교 개발의 역사를 강남의 역사로 포함하는 이 책을 따라가며 처음으로 강남”의 속깊은 이야기를 자세히 알게 됐다.

책을 읽으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될 때만큼 신나는 일이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신났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참 많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사실들을 몇 가지 나열해 보자면 이렇다. 예전 몸 담았던 회사 근처에 있던 영동고등학교, 그리고 술 먹으러 자주 들락거렸던 영동시장, 영동이란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연유를 몰랐는데 영등포 동쪽이라서 영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지금 강남 지역이 예전에는 영동 내지는 남서울이라고 불렸다니 흥미롭다.

또 동네 이름값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신사, 논현에 왜 이렇게 언덕이 많은걸까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이 책에 답이 있었다. 논현의 현은 고개 현인데 예전 강남개발 시에는 평탄화 작업을 할 기술도 없었고 속도전이라 언덕을 깎을 시간도 부족했다고 한다. 이후 분당 개발부터는 평탄화 작업이 적용됐는데 그래서 같은 고개 현이 들어가는 분당의 서현은 평지인 반면에 논현, 신사는 언덕이 많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린벨트가 생겨난 기막힌 이유, 예술의 전당이 최악의 건축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지금의 8학군이 생겨난 과정, 2호선이 고속터미널로 지나가지 않은 이유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뿐만 아니라 강남의 어두운 일면인 부동산 투기,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사건 등 시대의 문제점과 아픔 등을 적나라하게 들춰보고 뒷이야기를 파헤친다.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덕에 주말 하루 동안에 책을 다 읽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거나 내지는 재미있는 옛날 얘기를 들은 듯한 느낌이다. 한때 잠실에 살고 강남으로 출퇴근했으면서도 강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막연히 강남에 대한 반감과 현대사가 낳은 괴물 지역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던 내게 새로운 시각으로 강남을 바라보게 한 의미 깊은 경험이었다. 지금의 강남이 어떻게 태어나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글은 반디앤루니스 서평단 펜벗 활동으로 작성 되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_환상의 빛 읽다


상에는 참 다양한 문장이 있다. 치열한 구성이 빛나는 글, 수건을 각 잡아 개키듯 차곡차곡 논리적인 글, 번득이는 묘사로 감탄을 자아내는 글, 말랑말랑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글, 새로운 시각으로 눈의 비늘을 벗기는 글때로는 샘 날 정도로 탐나고, 때로는 좌절감을 안겨줄 정도로 위대한 문장들 가운데서 특히나 흠모하고 동경하는 스타일은 따로 있다. 바로 읽는 순간 풍경이 머릿속에 가득히 그려지는 문장이다. 책을 읽다 그런 글을 발견하면 가만히 책장을 덮고 그 풍경을 그린다. 그러고서는 몸을 붕 띄워 문장 속 시공간으로 날아가 풍경을, 주인공을, 사건을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곤 한다. 그림을 그리듯 유려하게 쓴 문장을 보면 왠지 설렌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그런 문장이 모인 책이다. “이제, 저는 서른두 살이 되었습니다.”라는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8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소설은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까워 자꾸만 천천히 음미하게 된다. 올해로 서른두 살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유미코는 소설의 화자다.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지금은 조리사로 일하는 다미오와 재혼해 와지마라는 조그만 어촌에서 살고 있다. 유미코는 이층 창가에 앉아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너른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이는 잔물결, 시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어부들을 한 순간 흐리멍덩 꿈꾸게 만들어 버리는 불온한 잔물결(다시 말해 환상의 빛)을 보면서 목숨을 끊은 전 남편을 떠올린다.

 

사고도 병도 아니었다. 남편은 어떤 힌트도 없이 어떤 짐작조차 남겨놓지 않은 채 돌연 자살을 한다. 그것도 한밤 중에 철로 위를 걸으며 뒤에서 경적을 울리는 전철을 피하지도 않은 채 죽음을 등허리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유미코는 이 사건이 있은 후로 전 남편은 도대체 왜 죽음을 선택한 걸까 끊임없이 되묻는다. 소설은 그 속사정을 되짚는 유미코의 독백으로 점철된다. 죽기 열흘 전 평소보다 심하게 사팔뜨기가 되어버린 전 남편, 초등학교 6학년 외롭게 벽에 공을 튀기며 놀던 전 남편의 모습, 할머니의 사망신고와 동시에 유미코 인생 앞에 나타난 남편의 기묘한 타이밍, 모든 기억의 파편과 우연의 조각을 그러모아 전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 유미코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결국 소설의 끝에 유미코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과연 유미코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 작품 안에 웬만한 등장인물은 다 이름이 있음에도 전 남편은 이름이 없다. 유미코의 친정 가족과 재혼한 남편의 가족들, 재혼을 위해 다미오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만난 조선인 한씨도 동네에 사는 도메노씨까지도 모두 이름이 있지만 자살한 전 남편은 이름이 없다. 단지 유미코에게는 당신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전 남편에게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참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에도 아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깝고 정겨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해서 그만 황홀해질 때가 있습니다.”에서 전 남편은 단순한 타자를 넘어 유미코 안의 독특한 존재로 자리 잡았음을 암시한다.

 

작품 속 표현처럼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가슴이 먹먹하고 잔잔한 울림이 있는 소설이다. 주말 아침의 여유를 한껏 느끼며 책을 집어 든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80페이지 남짓을 다 읽어 버렸다. 책을 덮고 나자 마음이 꿀렁꿀렁한 게 왠지 계속 누워있을 수 없었다. 뜨거운 걸로 마음을 달래려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거실 커튼을 열었더니 웬걸. 온 세상이 하얗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미코가 앉은 바닷가 이층 창가에 앉아 함께 따스한 봄볕을 쬐다 왔는데 뭐랄까 시공간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2017 1, 앞으로도 이 겨울의 빛은 내게 환상의 빛으로 기억될 듯하다.


[이 글은 반디앤루니스 서평단 펜벗 활동으로 작성 되었습니다.]






잠깐 서서 뒤돌아보기 측면돌파 내인생

파리 다녀 오는 비행기에서 “도리를 찾아서”를 봤다. 와이프가 나만 쏙 빼고 조카랑 극장에서 따로 보는 바람에 포기했던 영화였는데 내심 반가운 마음에 정주행했다. 기대보다 더 재미있었는지 한 시간 반 가량이 휙 지나고 어느새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 두 눈으로는 멍하니 자막을 훑었고 머릿속으로는 도리 친구로 나온 문어 '행크'를 떠올렸다. 주인공은 분명 도리였지만 왠지 나는 도리가 아니라 문어 행크가 자꾸 생각 났다.


우리 문어 친구는 도리 그 놈의 물고기 뒤치다꺼리 하느라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다. 행크는 도리의 터무니 없는 부탁(이라 쓰고 몰염치라 읽는)에도 불평 몇 마디 늘어놓을 뿐 죄다 해결해 주는 의리맨에다,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으로 벽이면 벽, 화분이면 화분, 주변환경에 맞게 몸 색깔을 시시각각 바꿔 대는 능력자다. 스펙으로 따지자면 거의 어벤저스 뺨 때릴 급. 그런데 나는 행크의 활약을 보면서 왠지 짠했다. 행크에게 내 모습이 계속 오버랩돼서 말이다.


고백하자면 회사에서 나는행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도리의 어이 없는 부탁에 버금가는 윗선의 불합리한 요구에도 까라면 까 정신으로 일을 쳐낸다. 개인적 주관과는 일체 상관 없이 결정되고 처리되는 업무, 피드백에 따라 내 몸과 마음을 시시각각 재단하고 욱여 넣는 모습, 직장에서의 내 모습은 살아 남으려 발버둥치는 스크린 안의 행크와 판박이다. 지금이야 닳고 닳아 웬만한 상황에도 ‘에이씨’ 욕 한마디 속으로 삼키고 웃는 얼굴로 책상머리 앞에 앉아 있지만 사회 초년생 때만 해도 정말 큰 고민이었다.


참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견뎌냈나 싶은 사회 초년생 시절, 기형도, 박민규, 천명관, 장강명, 편혜영, 오쿠다 히데오, 다자이 오사무, 루쉰 등이 위로와 도움을 많이 줬다. 그 중에서도 회사 생활에 가장 꿀팁을 준 단 하나의 작품을 꼽자면 두말 없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내가 가진 책은 권혁 님이 번역한 2005년 초판, 돋을새김에서 나온 책이다. 페이지마다 밑줄도 많이 치고 메모도 수없이 해서 몇 년 지나지 않은 책인데 헤지기도 많이 헤졌다. 개인적으로 마음을 울린 글귀가 무척 많았던 책, 이번에 행크 덕분에 다시 한 번 펼쳐보니 사회초년생 시절의 나는 아래 구절이 굉장히 와닿았나 보다. 색색별 줄에 별표까지 붙었다.


“무력을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자 사이에는 어떤 공평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득 그 당시 회사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떠오른다. 날밤 까고 고민해서 들고 간 아이디어가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던 그 시절. 물론 신입사원의 미숙함 때문이었겠지만, 당시에 버려지는 아이디어를보며 느낀 감정은 부당함 단 하나였다. 아무리 봐도 내 생각이 더 좋은데 왜 윗사람들 아이디어만 좋다고 난리들인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마키아벨리를 읽었고 위의 한 문장이 신입시절 내 마음가짐 바꿨다. 정말 그랬다. 회사는 짬이 무기였고 죽창하나 없던 나는 정면 승부를 피하고 측면돌파를 선택했고 나만의 무기를 남몰래 갈고 닦았다. 막막했던 신입시절을 마키아벨리의 충고로 견뎠다.


그렇게 몇 년이 훌쩍 지났고 어느덧 짬이 차고 무기가 갖춰진 요즘 군주론은 또 다르게 읽힌다.

(군주는) 사랑 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자를 해칠 때보다 두려워하는 자를 해칠 때 더 주저합니다.

자비로 인한 혼란보다 잔혹함으로인한 질서가 낫습니다.

군주라면 사악하게 행동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이란 리더에게 꼭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 권위와 명분 없는 두려움은 증오를 불러오기 때문에 그 밑바탕에는 명분과 합리가 꼭 수반되어야 한다. 요즘 부쩍 피부로 느끼는 점인데 조직을 이끄는 리더라면 새겨들을 말이다. 마냥 사람 좋은 리더가 되려고 팀원에게 책임이 결여된 자유와 충고가 거세된 배려를 남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스 도상학에서 디케(정의)가 종종 네메시스(복수)의 모습으로 읽히는 것처럼 팀원의 입장에서는 팀장이 선의로 부여한 자유가 우유부단으로, 배려가 책임회피로 해석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놓고도 몇 년 전의 나와 요즘의 나는 전혀 다른 각도로 책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하나 변하지 않은 건 그때도 지금도 군주론은 어느 페이지를 펼치건 어떤 문장을 읽건 남다른 영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오늘 다시 읽어본 군주론은 결국 '관계'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알아낼 수 있었고. 지금의 나는 행크지만 몇 년 뒤에는 무엇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바라는 모습은 있다. 몇 년 뒤에 오늘을 추억하며 또 군주론을 읽어볼까 한다. 






회사 부적응자의 고백 측면돌파 내인생


고백하자면 난 회사 부적응자다.

카피라이터인 나는 몇 달 전 큰 결심을 했다. 대행사를 떠나 일반 기업 마케팅팀으로 옮기는 결심 말이다. 어차피 소비자 설득시키는 일인데 크게 다르겠느냐는 생각이었지만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랄까. 그냥 많이 달랐다. 하나하나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단적으로 회의 시간 분위기를 예로 들어보자면, 대행사에서는 시시껄렁한 농담따먹기가 7할 정도로 많았는데 옮긴 곳은 얄짤 없었다. 웃자고 헛소리했다간 나사 빠진 놈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되게 스마트한 척 앉아있다. 필요한 이야기만 하고 말수는 최대한 아끼며.

적응이 힘들었다. 일하는 방식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낯설었다. "No"라는 단어는 머리속에서 지우고 엉뚱한 상상을 많이 하며 아이디어를 뽑아야 했던 대행사와는 달리 여기는 착착착 논리대로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야 박수 받는 곳이었다. 영양가 없는 마라톤 회의가 수시로 있었다. 회의할 주제는 회의 전에 정하고 회의시간에는 그 내용으로 갑론을박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내 상식은 이곳에서 보기 좋게 빗나났다. 여긴 회의 시간에 회의 주제를 정하고 그 자리에서 한번에 아이디어를 짰다. 그러다보니 회의는 네다섯시간을 넘기 일쑤였다. 회의는 제발 꼭 필요할 때만 하자구요,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침묵 뿐이었다.

그렇게나 힘든 나를 더 힘들 게 한 건 낯선 마케팅 용어들이었다. 생각이 좀 삐딱한 나로서는 아직도 이부분이 마음에 안든다. 어느 업을 가나 실무 언어가 있는데 이는 일종의 언어 권력 형태로 나타난다. 의사들이 자기네끼리 알아듣지도 못할 용어로 이야기 주고 받고, 차트에다가 뭔 글자인지 다시 태어나도 못 알아 먹을 지렁이 글씨를 쓰는 것처럼. 물론 여기도 그런 게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좀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요란한 줄임말과 한글과 영어가 짬뽕된 문장의 홍수. 원칙 같은 거 지니고 회사생활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별의미 없는 줄임말이나 쓸데없는 영어는 섞어쓰지 않기로 했고 아직도 나름 잘 지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게 있었으니 다름아닌 보고서 작업. 대행사 저연차 시절 A4 용지로 머리 맞아가며 "한 페이지엔 한 메시지만!"을 신앙처럼 받들며 배워왔는데 여기서는 한 페이지를 종합선물상자처럼 꾸며야 했다. 나의 새로운 팀장은 내게 보고서 작업을 끊임없이 던졌고 동시에 빨간펜 선생님으로 빙의했다. 보고서 최종, 최최종, 최최최종, 최최최최종, 더이상 최종을 쓰지 않고 1, 2, 3... 숫자가 20이 넘어가자 난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팀장 혹시 보고서로 직원들 괴롭히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디스트가 아닐까하고 말이다.

결국 적응보다 탈출이 쉬워보였다. 이건 포기하고 도망치는 꼴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긴 했지만, 여기 일은 여기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잘 하는 일을 하는 게 맞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다시 대행사로 복귀하려고 여기저기 면접을 잡았다. 어쨌건 그건 내 입장이고 회사엔 회사의 입장이란 것이 있어서 일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났다. 그때는 정말 될대로 되란 마음가짐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오히려 도움이 될줄이야... 만약 여전히 너무 잘하려고 안간힘 썼다면 난 끝내 허우적대던 진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대니얼 J. 래비틴은 <정리하는 뇌>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이런 일은 직장에서도 나타난다. 감독을 맡은 사람은 그 역할 때문에 감독을 받는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 있어 보일 수밖에 없다(중략) 하지만 부하직원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없고, 초기 단계나 중간 단계에서 일의 진척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 상태로는 직원의 성과가 상사의 기대에 부합하기 어렵고, 그 결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랬다. 사실 나는 팀장이 짜놓은 판 안에서 팀장 마음에 들기 위해서만 안간힘 쓰고 있었고 었던 거다. 학력에 짬에 쓰는 용어까지 같은 방법으로는 팀장을 절대 이길 수가 없었는데 난 계속 팀장의 스타일을 흉내내며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게 정답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정도 반포기 상태가 되고 내 마음대로 보고서를 쓰자 팀장의 반응 자체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보고서에 토시 하나 가지고 10분 20분 장광설을 펼치던 사람이 내 멋대로, 쓰고 싶은 대로 보고서를 써가자 별다른 지적 없이 일상 용어를 전문 용어로 바꿔 써라 정도의 주문만 했다. 180도 변한 반응에 어리둥절했었다.

대니얼 J. 래비틴은 이런 얘기도 한다.
자신의 수행능력 판단에 관여하는 두 하위영역은 배외측 전전두엽피질과 안와피질이다. 이 둘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우리는 자신을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재즈 음악가들은 즉흥연주를 하는 동안 이 영역을 꺼두어야 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말하는 성가신 자기평가 없이 자유롭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 작업에 헤맬 당시 내 뇌 상태는 저랬던 거 같다. '아, 이렇게 썼다가 또 뺀찌(?)먹으면 어떻게 하지?', '이 단어보다 저 단어가 더 나은가? 아니야, 아까 그게 더 좋았던 거 같애' 등 자기검열의 늪에 빠져버렸던 거다. 그러다보니 진도는 진도대로 안 나가고 힘은 힘대로 빠지고 결국 내 능력을 탓하며 이 일은 나랑 안 맞는 구나하고 포기해버리게 된 거 같다.

이런 비밀(?)을 깨닫고 나는 마음가짐을 고쳐먹었다. 일명 '다 거기서 거기' 마음가짐. 팀장이건 누구건 어차피 나같은 평직원 나부랭이와 같이 일할 정도 급이면 피차 월급 받아먹는 가련한 동병상련의 입장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결국 별반 다를 것 없는 위치란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가 막히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이 마음가짐은 내게 바이블 되었다. '자, 이게 제 생각입니다.  그쪽 생각은 어떠세요? 어쨌든 결정권자이자 위에 보고할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이니 제가 만든 거 보고 의견을 주세요. 물론이죠. 고쳐드립니다. 그렇다고 뭐 이게 틀린 건 아니니까요.' 

다시 한 번 고백하자면 난 회사 부적응자다.
지금은 아닌척하고 있지만 사실 내 밑천이 드러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철저한 회사생활 부적응자다. 그럼에도 별 걱정 않는다. 사실 걱정해봤자 딱히 답이 없어서기도 하고 대니얼 J. 래비틴이 <정리하는 뇌>에서 얘기한 이 문장도 꽤나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키우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 있는 척하는 것이다.
난 부적응자지만 자신 있는 척한다. 그리고 걱정 없는 척한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정말 자신감이 생기고, 걱정도 없어지니까.



그래서 니 연봉이 얼마라고? 측면돌파 내인생

연봉 얼마 받으세요?
 
별 친분도 없는 사람이 종종 "연봉 얼마세요?" 따위의 질문을 던져오면 "알아서 뭐하시게요?"하고 맞받아치고 싶은 심정이다. 실제로 그런 말 뱉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결국 답변은 나의 몫. 질문을 받으면 짧은 찰나에 질문을 던진 사람과 나의 역학관계, 친밀도, 장기적 교제유지 가능성 따위를 파바밧 계산해서 대답해주곤 한다. 물론 99.9% 방어적으로.

대답은 대충 이런 식이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은 벌어요"라든지 "벌만큼 벌죠" 내지는 "몇 천 좀 안됩니다"라고 최대한 모호하고 어중간하게. 상대가 누가 됐든 수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단 한 번도 "아, 저요? 몇 천 몇 백 몇 십만 원입니다"라고 이야기해본 적 없다. 대답을 대충 뭉갠 뒤에 후다닥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리지만, 언제나 그렇듯 뒷맛은 개운치 않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연봉은 쉽사리 까기 어렵다. 지금보다 어렸을 땐 마치 "성적 취향이 어떻게 되세요?"와 맞먹을 만큼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연봉은 사적이고 노출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바버라 애런라이크를 읽은 즈음부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자기가 쓴 배신 3부작 중 하나인 <노동의 배신>에서 사람들이 연봉 오픈을 꺼리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수입을 극대화할 수 없게 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꼽았다. “사람들은 각자가 받는 보수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도덕률이죠.”

엄청난 통찰력이자 기막힌 발상 아닌가. 돌이켜보면 열정페이를 받던 사회생활 초짜 쭈그리 시절에도 그랬고 이름만 대면 아는 큰 회사에 들어가서도 그랬다. 입사할 때 어김없이 들었던 말은 "연봉 다른 직원들한테 공개하지 마세요"였다. 심지어 후자의 회사는 팀원들이나 동기들에게 연봉 액수를 공개했다 적발되면 징계하겠다고 엄포까지 놨다. 사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나는 직원들끼리 자기 연봉을 공유하지 않는 건 서로를 위한 작은 배려라고, 상식적인 일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내 연봉을 알려주면 나보다 적게 버는 사람이 속상하니까. 반대로 상대방도 자기 때문에 내가 속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테고. 지극히 예의와 배려를 최우선시하는 동방예의지국적 처사라고만 생각했다. 거기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는데, 무려 자본가의 복마전이라니! 왠지 홀딱 속은 기분 아닌가.

"억만장자를 우상화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시간당 7달러, 심지어 시간당 10달러를 받는다는 것은 열등한 유전자를 타고 났다는 증거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이렇게 덧붙인다. 맞다. 연봉은 한 사람을 규정짓는 척도가 되어버렸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현실이다. 어쩌다 이런 인식이 우리 뇌리에 콱 박혀버린 걸까? 개인적으로 서로 연봉을 쉬쉬하고 월급명세서를 서랍에 숨기고 비밀스럽게 지키는 행동 자체가 저런 사회풍조를 만드는 데 한 몫 했다는 생각이다. 직원끼리 연봉 수준이 공유되면 누군가 연봉을 비상식적으로 많게 혹은 적게 받는 일이 줄어들텐데 말이다.  

웬만하면 동네 골목까지 쑤셔 들어온 대기업의 대형 슈퍼, 대형 프렌차이즈 음식점, 시대에 역행하는 갑질 기업의 제품 등은 이용하지 않는다. 나 하나 유난떤다고 세상이 별반 달라지겠냐마는 그래도 지키려 노력한다. 비록 불매운동 내지는 투표 같은 수동적 참여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회 참여가 모이면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스테판 에셀의 주장을 믿으니까.  

결론적으로 요즘 회사에서 이런 맥락에 입각해 믿음을 실천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연봉을 물어오는 사람이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가 옆에서 일하는 애들 옆구리 쿡쿡 찌르며 연봉을 묻고 다닌다. 물론 내 연봉을 먼저 까면서 말이다.
"야, 난 회사에서 연봉 이만큼 받는데, 넌 얼마냐?

우리 서로 연봉 까자,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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